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779년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개시한 영국군은 [[서배너 공방전]], [[찰스턴 공방전]], [[캠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조지아 주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를 장악했다. 그러나 뒤이어 노스 캐롤라이나 주로 진격한 찰스 콘월리스 소장 휘하 영국군은 네더니얼 그린 소장이 이끄는 대륙군과 십여 차례 전투를 치렀지만 그린이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바람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갈수록 병력이 소모되었다. 게다가 1780년 5월 29일 왁스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배내스터 탈턴 중령이 포로로 잡은 대륙군 병사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탈턴 본인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이 전투 도중에 말이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낙마하여 의식을 잃은 사이, 부하들이 자기가 죽었다고 여기고 극도로 분노해 적군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지만 포로를 학살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신대륙 주민들은 그가 학살을 명령했다고 의심했고, 마침 영국군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 소장이 투항한 대륙군 병사를 가석방하던 관례를 취소하자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여겨 분노했다.], 미국 내부에서 영국군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커져 곳곳에서 민병대가 일어나 영국군 장교들을 저격하고 보급품을 약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2년간 그린의 대륙군을 추격하던 콘월리스는 1781년 3월 14일 그린의 대륙군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길퍼드 코트하우스 인근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잡힐듯 말듯하면서 자꾸만 아군을 괴롭히는 얄미운 그린을 이번 기회에 끝장내기로 결심하고 서둘러 길퍼드로 향했다. 3월 15일 아침, 콘월리스는 적군을 발견하자마자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지도 않고 서둘러 적군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북미 식민지 남부 일대의 패권을 둘러싼 양측의 맞대결이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